기업 커뮤니케이션의 세 겹: 그루닉이 예견하지 못한 다섯 번째 소통

Insights · 2026.02.14

PR·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읽는, AI가 매개하는 기업 소통의 구조적 전환


제임스 그루닉(James Grunig)은 1984년에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네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언론 대행(Press Agentry), 공공 정보(Public Information), 쌍방향 비대칭(Two-Way Asymmetric), 쌍방향 대칭(Two-Way Symmetric). 가장 성숙한 형태인 쌍방향 대칭 모델은 기업과 공중이 상호 이해와 조정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소통을 뜻한다.

이 네 모델 모두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소통의 양쪽 끝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기계가 매개하는 다섯 번째 소통이 등장했다. 기업이 메시지를 발행하고, AI가 그것을 판독하여, 인간에게 재전달하는 구조다. 대화는 있지만 직접적이지 않다. 기계가 매개한다. 이 글은 기업 커뮤니케이션이 작동하는 세 겹 — 시각적 선언, 콘텐츠 축적, 기계 매개 — 을 살펴본다. 세 번째 겹이 곧 다섯 번째 모델이 작동하는 장소다.


브랜드의 시각적 선언

기업 커뮤니케이션에서 시각적 첫인상은 메시지의 전제 조건이다. 메시지가 전달되기 전에, 그 메시지를 발신하는 기업의 격이 먼저 판단된다.

뉴스룸, 미디어허브, 기업 홈페이지의 시각적 신뢰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이미지 품질, 일관된 브랜드 시스템 — 이 요소들이 “이 기업이 발신하는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첫 번째 신호를 보낸다.

한국 대기업의 뉴스룸을 보면, 시각적 완성도는 대체로 높다. 글로벌 기업 수준의 디자인 시스템을 갖춘 곳이 적지 않다. 중견기업도 리뉴얼을 거치면서 시각적 격차를 좁히고 있다. 이 레이어에서 한국 기업의 역량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 레이어만으로는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다. 시각적 신뢰도는 메시지를 “들을 준비”를 만들어줄 뿐이다. 메시지가 실제로 전달되고, 축적되고, 확산되려면 다음 레이어가 필요하다.


콘텐츠가 축적되는 구조

기업이 발행하는 커뮤니케이션 콘텐츠의 종류는 다양하다. 보도자료, ESG 보고, 브랜드 스토리, 기술 리포트, CEO 메시지, IR 자료, 채용 소식. 문제는 이 다양한 콘텐츠가 어떤 구조로 축적되고 있느냐다.

국내 97개 기업 뉴스룸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이 보도자료 원문 게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날짜순으로 나열된 게시판에 보도자료가 올라가고, 검색과 필터링 기능은 제한적이며, 콘텐츠 유형 간의 구분이 모호하다. ESG 보고서와 신제품 출시 보도자료가 같은 목록에 섞여 있다.

날짜순 나열과 주제별 구조화의 차이는 크다.

날짜순 나열: 최신 보도자료가 맨 위에 올라간다. 3개월 전 콘텐츠는 사실상 발견되지 않는다. 방문자는 첫 페이지만 보고 떠난다. 10년간 축적된 콘텐츠가 있어도, 작동하는 것은 최근 5~10건뿐이다.

주제별 구조화: 콘텐츠가 유형별로 분류된다. 보도자료, ESG 보고, 기술 리포트, 브랜드 스토리가 각각의 카테고리를 갖는다. 사업 분야, 주제, 연도로 필터링이 가능하다. 3년 전의 ESG 보고서도 “ESG” 카테고리에서 쉽게 발견된다. 콘텐츠가 축적될수록 뉴스룸의 가치가 올라간다.

PESO 모델에서 기업 뉴스룸은 Owned 미디어다. 기업이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는 채널이다. 전통적으로 Owned는 네 가지 미디어 유형 중 가장 낮은 위상을 가졌다. 언론이 보도해주는 Earned가 더 가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Owned 미디어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 즉 콘텐츠가 축적되고, 발견 가능하며,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커지려면 — 구조가 필요하다. 구조 없는 Owned 미디어는 보도자료의 무덤이다. 구조가 있는 Owned 미디어는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거점이다.


기계가 매개하는 소통

그루닉의 네 모델에서 소통은 기업과 공중 사이에서 직접 일어났다. 다섯 번째는 다르다. AI가 중간에서 판독하고, 재구성하고, 전달한다. AI가 기업 뉴스룸의 콘텐츠를 인용하는 메커니즘은 이렇다. ChatGPT가 사용자의 질문을 받으면, 관련 출처를 검색하고, 콘텐츠를 판독하여, 답변에 발췌한다. “이 기업에 따르면…”이라는 인용이 달린다. 기업은 메시지를 발행했지만 대화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답변을 받았지만 기업과 직접 소통하지 않는다. AI가 양쪽 사이에서 판독하고 재구성하고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Owned 미디어의 위상이 역전된다. 기업이 자사 도메인에 발행한 콘텐츠(Owned)가 AI 엔진의 답변에 출처로 채택된다. Owned에서 직접 AI-Earned가 생성되는 구조다. 언론 보도를 기다리지 않아도, 기업이 발행한 콘텐츠 자체가 AI를 통해 수백만 명에게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전환이 자동으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구조화 데이터(Schema.org)가 없으면 AI는 콘텐츠의 유형과 맥락을 식별하지 못한다. 시맨틱 HTML이 없으면 AI는 본문과 부차적 정보를 구분하지 못한다. 핵심 메시지가 인포그래픽 이미지 안에만 존재하고 텍스트로 제공되지 않으면, AI 크롤러는 그 메시지를 읽을 수 없다. 보도자료가 PDF 파일로만 게시되면, AI가 내용을 파싱할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종류의 장벽이다. 인간에게는 완벽한 콘텐츠가 기계에게는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 홍보팀은 완성도 높은 콘텐츠를 발행했다고 생각하지만, AI 엔진에는 그 콘텐츠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응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뉴스룸에서 시작하는 전환

기업 뉴스룸은 이 전환의 자연스러운 시작점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뉴스룸은 이미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발행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보도자료, ESG 보고, 브랜드 스토리, 기술 리포트 — 이 콘텐츠들이 이미 생산되고 있다. 문제는 콘텐츠의 양이 아니라 구조다. 이미 발행되는 콘텐츠를 구조화하고, Schema 마크업을 적용하고, 역피라미드 구조로 작성하면, Owned 미디어가 AI-Earned를 직접 생성하는 구조가 실현된다.

새로운 채널을 만들 필요가 없다.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할 필요도 없다. 이미 있는 것을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설계하는 것이다.

그루닉의 다섯 번째 모델 — 기계 매개 소통 — 이 작동하려면, 기업이 발행하는 모든 콘텐츠에 기계라는 청중을 추가해야 한다. 인간 독자를 위한 서사와 맥락은 유지하되, 기계 독자를 위한 구조와 명시성을 더해야 한다. 두 청중을 동시에 설계하는 것이 과제다.


마무리

40년간 유효했던 전제가 있다. 소통의 상대방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제 그 전제에 한 항을 추가해야 한다. 소통의 상대방에 기계를 포함시켜야 한다.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설계 범위가 한 겹 더 넓어져야 한다. 인간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계가 판독하고, 재구성하고, 재전달하는 경로까지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이미 콘텐츠가 발행되고 있는 공간 — 기업 뉴스룸이다.


박용덕 — 스튜디오파티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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